• UPDATED. 2021-09-28 10:33 (화)
  • TODAY : 160 명
  • TOTAL : 9,856,189 명
요가 많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잘하냐고요?
요가 많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잘하냐고요?
  • 변윤정 기자
  • 승인 2021.08.26 08: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백호, 서태웅, 정대만.

30대를 넘은 나이라면 이 이름들을 듣고 가슴 뛰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린 시절 농구공 하나 들고 운동장을 뛰어다니게 만든 그 전설적인 만화 ‘슬램덩크’의 주인공이니까. 앞서 말했듯 나는 타인의 계기를 궁금해 하는 사람이다. 계기. 어떤 일이 일어나거나 변화하도록 만드는 결정적인 원인이나 기회. 혹시 강백호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기억하시는 독자가 계실는지? 강백호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데는 미모의 여고생 채소연이 있었다. 채소연의 미모에 넋이 나간 강백호는 ‘농구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에 ‘네, 아-주 좋아합니다. 난 스포츠맨이니까요.’라는 대답을 하게 되고, 그렇게 농구인으로서의 좌충우돌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이쯤 되면 강백호가 농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짝사랑 때문이 아닌가 싶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네, (농구를) 아-주 좋아합니다.’ 라는 공약에 의한 의무가 진정한 이유일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 입으로 농구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그 공약을 실현해야 할 의무가 생긴 셈이다. 이를 윤리학에 서는 ‘공약의 부담’이라고 일컫는데, 다들 예상하겠지만 이 ‘공약의 부담’이라는 것은 참으로 피곤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요가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웬 농구 이야기를 하더니 윤리학 이야기까지 왔나 싶겠다만, 나는 요가를 시작하고 난 뒤 이 ‘공약의 부담’을 매우 높은 빈도로 부딪혀왔다. 아니 여전히 이 부담을 지고 있다. 요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에 따르는 부담말이다. 나는 요가가 좋다. 많이 좋다. 그래서 누군가 내 취미를 물어보거나 주말에 뭘 하면서 쉬냐고 물어보면 ‘요가!’라고 대답한다. 취미가 요가이고 주말에도 요가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요가를 매우 잘하고, 엄청나게 유연해서 몸을 배배 꼬 아 어려운 자세를 손쉽게 만들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나보다. 그렇게 사람들은 으레 ‘아 그럼 되게 유연하시겠어요. 주말에도 할 정도면 요가 되게 잘하시겠어요.’ 라고 말한다. 물론 그냥 빈 말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농담이든 진담이든, 이 순간이 바로 요가를 좋아하고 매일 수련하다는 선언의 공약의 부담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요가를 좋아하다는 공약에 따르는 부담은 ‘유연한 몸을 유지한다’거나 ‘어려운 동작을 잘 해낼 수 있다’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의 삶 자체가 요가적이길 바라는 것이다. 왠지 도인 같고, 속세에 찌들지 않고, 과한 욕심을 부리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고, 세속적이지 않은 그런 모습까지 은근히 요구된다. 그래서인지 나도 요가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요가를 좋아한다고 선뜻 말하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뭐랄까, 나의 삶이 요가를 좋아한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요가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때는 ‘그냥 어쩌다 요가원가요. 시작한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나의 눈빛은 ‘나 요가 잘 못하니까 큰 기대 말아요’ 라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같이 전달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공약을 회피하면 보다 관대한 시선을 마주할 수 있다. 이를테면, 원데이 클래스에 갔을 때 ‘요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하셨는데, 남자분치고 꽤 유연한 편이네요.’와 같은 칭찬들. 아, 이런 장점도 있다. 어려운 동작을 성공해내지 못해도 괜찮다는 점. 요가를 시작한 지 6개월도 넘었다는 점을 말해 놓고 머리서기를 성공하지 못하면 꽤나 민망하다. 물론 주변에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나 혼자 민망해하는 것이었겠지만, 어찌 되었든 ‘민망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강백호가 그때 농구를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면, 그의 농구 여정이 시작될 수 있었을까? 채소연의 질문에 ‘네, 아-주 좋아합니다.’라고 일단 지르고 봤던 강백호는 만화 의 마지막에서 ‘(농구를)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라고 힘주어 말한다. 농구를 좋아한다고 일단 선언한 뒤 그에 따르는 맹훈련을 성실하게 수행한 그는 멋진 농구선수로 성장하여 결국 진심으로 농구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성장을 하기 위해서 때때로 공약을 내걸 필요가 있다. 공약을 선언하고 그에 딸려오는 부담을 바로 마주하며 성실하게 이행해 나갈 때 우리의 삶은 1cm 더 성장한다. 요가를 시작한지 6개월도 훌쩍 넘었지만 어느 원데이 클래스에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얼버무리던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가을 날, 나는 결심했다. 요가를 많이 좋아한다고 선언하기로. 요가를 좋아하고 열심히 수련하다는 공약의 부담을 오롯이 짊어지기로 말이다. 요가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에 따르는 부 담을 짊어지는 것. 요가적인 삶의 시작이다. 요가 많이 좋아합니다. 그래서 잘하냐고요? 글쎄요, 아직은 부족한 점이 많지만 분명한 건 어제보다는 조금 더 잘하게 된 것 같아요.

 

안현진(작가, 인스타그램 @introvert_scot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