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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 숫자 = 나란 사람
숫자 + 숫자 = 나란 사람
  • 유승민
  • 승인 2021.02.2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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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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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오면 가장 먼저 양치를 한다. 화장을 지우고 세수를 한다.
냉장고 속 차가워진 알로에 젤을 손바닥에 담아 얼굴에 바른다. 핸드폰이랑 노트북을 소독솜으로 스윽스윽 닦아준다. 침대에 앉은 채 팔을 뻗어 노란 조명을 켠다.
그때쯤이면 오늘은 이런 글을 적어봐야겠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데 오늘처럼 많은 대화가 오간 날은 시간이 좀 걸린다.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조언을 건네야 한다는 묘한 책임감이 생긴다.
내 입에서 이미 말이 나가고 있는 순간에도 혹시 이 말투가 정답인 것처럼 강요하게 될까 봐 조심스럽다.
단어를 고르고 또 고른다. 나이가 어린 상대일수록 내가 하는 말이 진리인 것처럼 들리지 않길 바란다.
그래서 웬만하면 조용히 듣고 있는 걸 선호한다.

 

가끔 선배들을 만나 이런 고민을 하고 저런 생각을 하며 산다, 하면 어김없이 날아오는 질문이 있다.

-그래서 네가 지금 몇 살이라고?

대체로 긍정적인 답변이 돌아온다. 아직 한창이야. 괜찮네, 이제 시작이지.
대체로 그런 말들을 들으면 마음이 놓인다. 한편으론 모든 것에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 같아 갑갑하기도 하다.

 

오늘부로 인턴 생활을 마친 친구와 점심시간에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내일부터 그 친구는 자유로운 몸이다. 기자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두 눈 반짝이면서도 고민이 많은 눈치다.
"
만약 작가님이 지금 제 상황이라면 뭘 하실 것 같아요?" 난감한 질문이다내 인생을 돌아봤다. 하고 싶은 게 확고한 편이었다. 고민은 많았지만 오래 품고 있는 성격이 아니었고 때때로 부모님의 조언이 큰 몫을 해주었다. 대개는 이정표를 그려주며 이건 어떠니? 건네 왔다.


 

인턴을 마치고 언론사 시험을 앞둔 스물일곱 살에게 뭘 말해주는 게 좋을지, 사실 모르겠다. 다른 동료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말한다. "여행을 가, 지금밖에 없어. 취직하면 못 가" 얼핏 듣고 따라 말해보았다.
"
여행도 다니고 책도 많이 읽어." 내뱉으면서도 참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한 말을 그대로 읊조린 스스로에 대한 질책이다말문을 흐려가며 곰곰이 고민한 끝에 내가 꺼낸 말은 결국 "그래서 네가 지금 몇 살이라고?"였다.

 

스물일곱 살에게 해야 하는 일이 정해져 있을까. 내 경험에 비추어 생각하는 순간 "라떼는 말이야. " 가 시작될 것 같아 내 인생담은 고이 접어두었다. 집에 돌아오는 내내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뭐라도시작했으면 좋겠다. 뭐든 가장 하고 싶은 걸 했으면 좋겠다. 그 길이 아니라도 돌아갈 여유가 있으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뭘 하고 싶은지 치열하게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자신이 어떤 삶을 원하는지 잘 모른 채 사회에 나오는 친구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그런 추상적인 이야기는 아마도 그 친구가 원했던 대답은 아닐 거다.

 

-31살이면 몇 천 정도 모아야지.

-5년 차면 연봉 0천 정도 아니겠어?

-그 연차에 월급은 000원 정도는 되어야지. 못 받으면서 왜 일해.

 

며칠 전 포털 사이트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내 연봉은 평균 이상? 이하?> 라는 제목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클릭하고 있었다. 나와는 거리가 먼 숫자들이 나열되어 있다.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이 기사를 읽고 난 뒤에도 그 전과 같은 심정일지 궁금했다. 클릭을 유도하기 위한 기사일까. 평균 연봉에 대한 정보 전달을 위한 기사일까. 평균 이하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출근길에 두 어깨 축 늘어뜨리지 않길 바랐다. 읽고 난 뒤의 사람들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는 기사를 바라는 건 너무나 큰 욕심일까.

 

-40살 넘어가면 슬슬 그만 일할 때도 됐지.

-70살 넘으면 책도 못 보지 않아? 눈이 안 보일걸?

-일하는 여자면 애는 제대로 못 키울 거 아니야.

 

최근 친한 동료들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잣대였다. 놀랐다.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과 저런 말을 타인 앞에서 너무나 쉽게 내뱉을 수 있다는 것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여심히 맞장구를 쳤다. 반박하고 싶었다. 65세에 KFC(캔터키 프라이드 치킨)를 만든 커넬 샌더스는요? 마흔 살에 토스트 노점으로 연봉 1억 달성한 김석봉 씨는요?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스마트노트와 펜으로 집필작업 중인 이어령 선생님은요?
 

 

아버지는 내일모레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다. 30년 동안 한 직장에서 일했다. 은퇴한 지 한참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장을 쫓아다닌다. 죽는 날까지 현장에 있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아버지의 행동은 늘 말보다 빨랐다. 삼각대와 카메라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고 밤낮 가리지 않고 책과 영화를 달고 산다. 한참 젊은 내가 소화하는 양의 곱절쯤 되는 독서량에 매번 놀란다.
 

난 맞벌이 부부의 여식이다. 삼시 세끼를 꼬박 차려주며 등하교를 오롯이 보살펴주던 기억이 내게는 없다. 엄마가 화장할 때 나는 분 냄새가 좋았다. 엄마가 입으려고 놓아둔 정장 치마를 만지작거리며 출근 준비하는 엄마를 올려다봤다. 옅은 버건디 립스틱을 발라보겠다며 엄마 흉내를 냈다. 쉬는 날 조용히 책을 읽는 엄마를 어깨너머로 바라보았다. 그런 엄마의 삶에는 늘 활기가 있었다. 나는 그렇게 자라왔다.

 

-작가는 나이가 들어가는데 기자들은 연차가 점점 낮아져.

-늙은 사람이랑 누가 일하고 싶어해.

 

같이 일하는 선배들이 어린 친구들과 점점 세대 차이를 느낀다며 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마흔도 안 된 나이에 은퇴를 고민한다. 선배들이 조금 더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현장에 있고 싶은데, 나이와 연차로 원치도 않는 직급을 떠안게 된 선배가 용기를 내주었으면 한다. 스물일곱 살이라는 예쁜 나이에도 이뤄놓은 게 없다며 자괴감에 빠진 동생들이 좀 더 당당해질 수 있었으면.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이라는 숫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니, 회사에 들어온 사람이 개념이 없어요,

푸념을 들으면 "몇 살인데?" 묻곤 했다.

 

-사업도 잘 안 되고 이제 슬슬 다른 거 찾으려고요,

신세 한탄을 들으면 "몇 년 했는데요?" 물었다.

 

어쩌면 나부터가 숫자에 집착했던 걸지도 모른다. 돈도 나이도 중요하지만, 숫자만이 그 사람을 대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좀 넘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면 어떤가. 그보다 중요한 게 우리에겐 있지 않은가.

 

 

 글: 명란과 현미

     일년에 한놈씩』 저자
     뉴스보도국에서
7년 차 방송 작가로 일하고 있다.
     
일본에서 20대를 보냈다. 말의 뉘앙스, 사람관계, 마음에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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