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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친구를 만나 행복했음을…
당신이라는 친구를 만나 행복했음을…
  • 박지은
  • 승인 2019.10.0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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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는 친구를 만나

행복했음을…

김이현 발행인


흙먼지가 지나가고 나타난 아미르 칸은 생각보다는 작은 키였습니다. 대부분 인도 남자 영화배우 이름이 칸으로 끝나서 은근히 멋진 청년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칸을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칸은 적당하게 나온 배와 동그란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체형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웃는 모습은 과장되었지만, 악의는 없어 보였습니다. 약간의 천진난만한 모습도 그만큼 허풍쟁이 같아 보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리시케시에서 가장 훌륭한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소개하면서 낡았지만 깨끗한 차로 안내했는데, 리시케시 람줄라 주차장에서부터 하르드와르까지 칸은 한 번도 쉬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완벽한 인도식 영어를 구사하는 칸의 이야기들은 대부분 이랬습니다. 우리의 차가 리시케시의 골목과 골목을, 큰길과 작은 길을 지나가는 동안 스치는 양옆의 수많은 가게와 상점, 학교나 여러 사무실이 자기 삼촌의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라든가, 저 골목 안쪽에는 친구 어머님이 하시는 식당이 있다든가, 아니면 고모에 이모뻘 되는 사촌의 식용품 가게가 바로 저기고 얼마나 장사가 잘되고 유명한 곳인지 끊임없이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아, 하는 감탄사와 함께 맞장구를 쳐주다가, 너무 길게 이어지는 칸의 이야기에 점점 말이 없어지며 약간의 짜증까지 올라왔습니다. 더군다나 너무 설명에 집중하느라 손짓하다 보면 전방주시가 흩트려져 몇 번씩 아찔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럼 약간 굳은 얼굴로 칸을 보았는데, 칸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감 있는 운전 솜씨를 뽐내며 무사히 12년마다 ‘쿰바멜라’ 축제가 열리는 하리드와르의 넓은 공터에 도착했습니다.

칸은 우리에게 귀중품을 잘 챙기라고 충고했는데, 혹시 모르니 귀중품이나 현금이 많으면 자신이 이 위험하고 사람 많은 곳에서 지키며 가지고 있어주겠다고 했습니다. 숙소마다 허술한 잠금장치 때문에 모든 경비를 몸에 지니고 컴퓨터까지 들고 다니긴 해도, 눈곱만큼도 맡기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맙지만 괜찮다고 했습니다. 대신 하리드와르에서의 일이 길어질지 모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말을 했습니다. 하리드와르에서의 미팅은 생각보다 길어졌고 갠지스강에서 아르띠 뿌자까지 참석해야 했으며 다시 이어지는 미팅으로 아주 늦은 밤이 되었습니다. 너무 늦었지만 칸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첫 미팅이 끝나고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야만 했습니다. 인도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도 뿌자가 끝나고 자신들이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갔고, 우리도 칸이 기다리고 있을 공터로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하리드와르 시장에서 넓은 공터까지 가는 길은 벌써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아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희미한 불빛 덕에 간단하게 짜이와 잘레비 왈라를 파는 노점상이 드문드문 있었는데, 그 불빛을 벗어나면 구걸하는 노숙자들의 남루한 잠자리를 피해서 걸어야만 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칸의 차는 만나기로 한 장소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터에서 벗어나 차들이 무섭게 달리는 도로까지 나가보았습니다. 리시케시까지 가는 차를 잡는 건 불가능해 보였고 간혹 릭샤가 와서 말을 걸어도 릭샤를 타고 2시간 넘게 비포장도로를 달린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시간도 정하지 않고 너무 늦게까지 일을 본 잘못은 있었으나, 사람 좋게 생겼던 칸에 대한 작은 원망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어쨌든 리시케시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서 다시 하리드와르 시장 쪽으로 가야만 했습니다. 코앞도 안 보이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다시 갠지스강 쪽으로 한 걸음씩 옮겨 겨우 넓은 공터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는 칸을 보았습니다. 칸은 우리들이 일을 마치고 나올 때 차가 좀 더 잘 보이도록 하리드와르 입구 가까운 곳에 대고 기다렸는데, 사람들이 거의 다 갔는데도 안 나와서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하고 찾으러 나섰다고 했습니다. 저 복잡하고 사람 많고 시끌벅적한 곳에서 어찌 우리들을 찾는다고. 그래도 만났으니 한숨 길게 내쉬며 다시 리시케시로 향했습니다. 조금은 주눅이 들었는지 올 때하고 다르게 조용해진 칸에게, 늦어서 정말 미안하고 끝까지 기다려줘서 고맙다 했습니다. 칸은 금방 밝은 얼굴로 변하더니, 금세 또다시 사돈에 팔촌에 이웃들과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말투로 혹시 리시케시에서 고기가 먹고 싶거나 술을 마시고 싶다면 자신이 언제든 구해다 줄 수 있다며, 아무도 못 해도 자신은 가능하니 원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습니다. 리시케시 시내에 접어들 때, 갑자기 칸은 어느 가게 앞에 차를 세우고 내리게 하더니 자신의 형님이라며 한 사람을 소개해주고 인사까지 시켰습니다. 어리둥절하게도, 그 후로 몇 번이나 차에서 내려 리시케시 사람들과 인사하며 짜이와 레몬차를 마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나중에는 약간 헛웃음이 나왔지만, 차츰 그 행동에 동요되어 시내에 사는 칸의 지인들과 인사하는 걸 즐기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칸의 행동은 ‘행위’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과나 과정의 동기 등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 순수한 행위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칸이 자신의 집이 근처인데 저녁을 먹고 가는 게 어떠냐고 해서 정중히 거절하는 데 애를 먹었습니다. 칸은 내가 자신의 진정한 친구라며 언제든 집에 놀러 오고 싶으면 오라고 진심을 담아 말해주었습니다. 우리가 만난 건 오후 반나절뿐인데, 어떻게 그 시간에 진실한 친구가 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칸의 진지한 얼굴에 대고 반론을 제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칸의 행동은 ‘행위’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과나 과정의 동기 등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 순수한 행위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때 칸에게 팁을 얼마나 줘야 할지 잠깐 생각해보았습니다. 비용은 벌써 회사를 통해 지불했으니 문제없지만, 칸을 생각보다 길게 기다리게 했고 칸에게는 오늘 회사에서 받는 일당이 전부일 거라는 생각에 1500루피(우리나라 돈으로 2만 원 정도)를 건넸습니다. 칸은 팁을 거절했습니다. 자신은 회사에서 돈을 받았기 때문에 팁을 안 받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리시케시에서 1500루피 정도면 그렇게 적은 돈이 아닐 텐데, 오랜 시간 기다리고 다시 안전하게 숙소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움의 표시라며 다시 팁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친구예요.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당신은 저에게 소중한 친구입니다. 소중한 친구가 제게 왔기 때문에 저는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뿐이에요. 저는 친구로 당신에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칸은 언제든 꼭 자신의 집에 한번 와달라며 다시 왔던 밤길을 되돌아갔습니다. 1500루피를 쥐고 있던 손이 무겁게 느껴져서 살며시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 한참을 칸이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았습니다.

코리아 요가 컨퍼런스가 끝나고 다음 달이면 칸이 사는 리시케시로 갑니다. 칸의 아이들에게 줄 학용품을 사서 내 친구 칸의 집을 방문해보려고 합니다. 분명, 환하게 웃으며 이번에도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줄 텐데, 전 흔쾌히 즐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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