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D. 2019-08-14 10:13 (수)
  • TODAY : 2,148 명
  • TOTAL : 7,160,102 명
누군가의 삶을 걷는다는 것…
누군가의 삶을 걷는다는 것…
  • 박지은
  • 승인 2019.08.01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걷는다는 것

김이현 발행인

 

새벽 3시에 일어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여행 중에 신체 리듬이 깨진 상태에서라면 마음가짐부터 단단히 해야 합니다. 그래도 시바신의 발끝이라고 불리는 히말라야의 끝자락 ‘마 쿤재퓨리 데비 아쉬람’에 올라간다는 설렘은 새벽잠의 달콤함과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버스에 올라타고 2시간 30분이 넘는 히말라야 산줄기를 올라갔습니다. 가끔 어두컴컴한 천 길 낭떠러지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면서. 파도에 몸을 실은 나룻배같이 출렁거리는 버스 안에서도 곤히 잠들었습니다. 더 이상 버스가 갈 수 없는 곳에서 멈춘 뒤엔 몇천 개나 될지도 모르는 계단을 올라갔습니다.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을 온몸으로 견디며. 그렇게 아쉬람 정상에 올라왔습니다.

“추운 새벽 히말라야에서는 짜이 한잔이 모든 행복 중에 가장 크다.”는 나빈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구멍가게로 갔습니다. 맞습니다. 이곳에서는 짜이가 최고입니다. 짜이 한잔으로 모든 것이 완벽하고 행복해진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어느덧 사람들은 히말라야산맥이 보이는 쪽으로 몰려가 저마다 자리에 앉거나 서서 응시했습니다. 눈을 감고 명상하거나, 만트라를 외우거나, 수리야 나마스카라 동작으로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곧 찬란한 수리야(태양)가 멀고 먼 히말라야 산맥에서부터 솟아올랐습니다. 그 태양은 새로운 시작이며 처음이며 영원함 같았습니다. 이처럼 아름답고 가슴 벅찬 수리야를 보기 위해서 단잠을 마다하고 올라온 것입니다. 춥지도, 피곤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까지 본 어떤 일출보다 아름답고 신비했습니다. 해가 떠오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우리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트레킹을 시작했습니다.

멀리 히말라야 산등성이를 주위 경치와 함께 바라보는 트레킹은, 살면서 꼭 해야 하는 경험이 아닐까 생각하며 천천히 걸어 내려왔습니다. 발걸음은 가볍고 온몸은 따뜻한 온기로 충만했습니다. 어느덧 차가 다니지 않는 산속으로 내려가는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분명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 같기는 한데 밀림을 헤치며 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앞장선 가이드는 나무와 우거진 덩굴과 풀을 거침없이 헤집고 내려갔고, 뒤따르는 일행은 영문도 모르고 앞사람의 등판만 보며 전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탁 트인 들판이 나와서 깊은 숨을 몰아쉬기도 하고,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고즈넉한 마을이 보이면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기도 했습니다. 몇백 년은 되었을 듯한 나무, 새, 원숭이들이 나타나면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두 시간을 말없이 걷다 차츰 앞뒤의 간격이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세 시간이 지날 무렵, 도저히 두 발로는 내려오지 못해 두 손을 동원해야 하는 비탈길이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사방에서 도깨비풀 가시가 옷은 물론이고 온몸을 찔러댔습니다. 모두들 중간에 쉴 때마다 몸에 붙은 억센 도깨비풀을 뜯어내며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네 시간에 접어들면서 말을 하는 사람은 없어졌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사람은 늘어났습니다. 얼마나 가야 하느냐는 질문엔 세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네 시간을 걸어 내려왔는데, 세 시간이 남았다는 말에 내면에서는 분노 비슷한 감정이 올라왔지만, 애써 꾹꾹 눌러버렸습니다. 몇 번이나 마을을 지나쳐 험하고 가파른 길을 내려가다, 모두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더 이상 못 가겠다고, 이건 트레킹이 아니라 등반이라고, 더군다나 내리막길을 등산화도 안 신고 등산 스틱도 없이 내려가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이구동성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우리들이 절뚝거리며 내려온 산비탈 정상에서 커다란 나뭇가지 더미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더니 쏜살같이 내리막길로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모두 쳐다봤는데, 앳된 소녀 둘이 몸집만 한 나무 한 짐씩을 머리에 이고 뛰어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다 떨어져 나간 샌들만 신고. 서로 이야기하는 듯 말소리도 들렸습니다. 일행 옆을 지나가면서는 얼핏 가이드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우리에게도 환한 미소로 인사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져버렸습니다. 일순간 사라진 소녀들의 잔상을 찾으려고 눈만 껌벅거리는 우리에게, 가이드는 조금만 가면 숙소에 도착하는데 그전에 시냇가에서 부은 발을 좀 담그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히말라야에서 내려오는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며 생각했습니다. 산은 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오르막길의 고단함 뒤엔 일출의 찬란함과 행복도 존재하지만, 내려가야 하는 고난과 역경도 남아있다는 것을. 그래도 묵묵히 걷다 보면 시냇가에 발도 담글 수 있다는 것을. 도깨비풀이 솟아있는 비탈길이 누군가에겐 삶의 터전일 수도 있다는 것을. 결국 지쳐서 절뚝거리면서도, 어차피 내려올 길이라면 툭툭 털고 내려와야겠단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가이드는 이 모퉁이만 돌면 자기 집이라며 차 한잔 하고 가라고 안내했습니다. 지친 우리를 맞이한 건 가이드의 친절한 식구들이었습니다. 처음 본 우리에게 자신의 쉴 공간을 내어주고, 진한 레몬차와 달고 맛있는 짜이를 내어준 그들의 미소는 새벽에 본 붉은 해와 같았습니다.

가이드는 끝내 팁을 받지 않았습니다. 집에 와주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자신의 산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산은 정말 서너 시간이면 내려오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단, 그 가이드처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서울에서 온 사람, 그것도 험난한 산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에겐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그곳은, 그들에게 있어 언제나 오르내리는 삶 자체였습니다.

초겨울이 되면 다시 그 산에 오르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등산화와 등산 스틱을 갖추고, 천천히 후회 없이 내려올 생각입니다.

 

서울에서 온 사람, 그것도 험난한 산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에겐
몇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그곳은, 그들에게 있어
언제나 오르내리는 삶 자체였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