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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요가 다녀왔습니다" │나무 자세가 필요할 때
신경숙의 "요가 다녀왔습니다" │나무 자세가 필요할 때
  • 신미진
  • 승인 2019.05.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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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요가 다녀왔습니다”

나무 자세가 필요할 때

 

나는 요가를 수련으로 생각하고 시작한 게 아니었다. 몸이 바스라질 정도로 피로를 느끼기 시작해 이대로 뒀다가는 소설을 계속 쓰는 일을 못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불안 때문에 시작한 일이었다.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그 마음에서 별반 달라진 게 없는 나 같은 사람을 보면 요가를 인생의 도반으로 여기며 마음을 확장시켜나가고 있는 분들이 보기에 안타까울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는다. 이 느낌은 요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더 강해졌다. 처음 뉴욕에서 나의 에이전트로부터 ‘요가를 그렇게 오래 해왔으면서 왜 글로는 쓰지 않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나도 의아했는데 지금은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겠다. 나는 ‘몸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다’라는 자기 위안에서 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요가 생활을 해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떤 작가가 ‘글로 쓰지 않은 책은 읽지 않은 거와 마찬가지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뜻을 알 것도 같다. 작가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나에게 생긴 어떤 일을 글로 쓰려고 마주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과 나와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실감을 갖게 되고, 문장으로 완성시켜야만 내가 한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나의 요가 생활을 글로 쓰지 않았던 게 아니라 쓰지 못하고 있었다. 돌봐주지 않고 오버해서 사용만 해온 몸의 통증으로 인해 몸 치유로 시작한 요가가 사실은 마음과 더 깊숙이 닿아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더 깊이 들어가지 않으려고 무의식적으로 마음을 썼다. 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것,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생각이 요가와 나 사이에 놓여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니는 요가 스튜디오는 분반을 하지 않았다.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나눔이 없이 새로 들어온 사람들과 오래된 사람들이 함께한다. 젊은이들보다는 나이 든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서 새로 요가를 하기 위해 등록하는 사람 또한 대부분 나이 든 이들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나는 젊은 사람 같지만 다른 이들 보기엔 나 역시 나이 든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처음 시작했을 때도 나는 젊지 않은 마흔이었다. 그럼에도 요가 스튜디오의 회원들의 나이가 대부분 나보다 많아서 내가 젊은 줄 알았다. 그동안 요가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원장이 몇 번 바뀌었고, 오늘 새로 오는 사람이 있듯이 그동안 함께 해오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더니, 처음 같이 시작한 사람은 이제 한 사람 남아있다. 그러니까 지난 십오 년 가까이 그분과 나는 우리가 사는 동네 요가 스튜디오에서 일주일에 서너 번씩은 만나온 셈이다. 조각을 하는 분이라는 것, 학교에서 이제 은퇴를 했다는 것 이외엔 별로 아는 게 없이 그 세월을 함께 수련해온 우리는 한번 이 요가 스튜디오에서 떠날 뻔한 위기를 같이 겪기도 했다.

요가를 처음 시작할 때와는 달리 나는 언제부턴가 서울을 한 달씩 떠나 있는 경우가 잦아졌다. 일 때문일 때도 있었고, 자발적 고립을 위해서인 적도 있고, 해외 체류가 길어져서인 때도 있었다. 어디에 있든 서울 내 동네의 요가 스튜디오 생각을 자주 했다. 9시 반에서 10시 40분까지 요가 스튜디오에 가는 일이 내가 오전에 하는 일로 굳혀지면서 나는 집을 떠나 어디에 머무르든 그 시간이 되면 ‘요가 해야 된다’ 생각을 했다. 머무는 도시에서 운 좋게 등록할 수 있는 요가 스튜디오를 찾아내면 거기서도 대부분 시간을 아침 9시 반 가까이 있는 클래스에 들어가곤 했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습관이 완성시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을 쓰는 시간을 정할 때도 마찬가지다. 늦은 (기준은 없지만) 결혼 후에 쓴 장편 소설들을 나는 대부분 새벽 3시에서 9시 사이에 썼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쓸 때에는 알람을 새벽 3시에 맞춰두어도 나는 2시 57분이나 58분쯤 눈을 뜨게조차 되었다.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에 사로잡혀있을 때도 나는 새벽 3시 근처에 눈을 뜨곤 했다. 서울이 아닌 다른 국외의 도시에 머무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곧 시차에 적응하고 곧 나는 새벽 3시 근처에 호텔의 간이 테이블이나 숙소의 식탁 의자에 앉아있곤 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날들도, 몸과 마음이 갯벌에 처박혀있는 것 같을 때도, 새벽 3시 무렵이 되면 그곳이 어디든 내 몸은 책상에 앉듯 앉아있으려고 했다.

 

꾸준히 요가를 해온 이유는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어서였다.
요가를 하는 동안은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들이 나를 떠나갔다.
그런데 그 집중 사이로 잡념이 불쑥불쑥 끼어들었던 것이다.

 

한번은 서울을 떠났다가 돌아오니 함께 요가를 시작했던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고 모르는 얼굴들뿐이었다. 호흡을 중요시 여겨서 요가 수업의 앞뒤로 호흡 시간을 많이 가졌던 원장 선생님 자리가 화목 수업만 했던 선생님으로 바뀌어있었다. 그사이 원장 선생님은 떠나고 화목 수업을 했던 요가 선생님이 요가 스튜디오를 인수한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월수금 수업을 맡아 했던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조차 보이질 않았다. 새로 요가 스튜디오를 인수한 원장이 월수금수업을 했던 선생님과 사이가 원만하지 않았는데 트러블 끝에 월수금 선생님을 그만두게 했다고 했다. 그 여파로 오랫동안 그곳에서 요가를 해온 사람들이 거의 그 선생님을 따라 나갔다는 것이다. 나도 좋아하던 선생님이라 그 선생님이 요가 스튜디오를 새로 오픈한 것이냐 물으니 스튜디오 오픈은 알아보고 있고 현재는 데크가 깔린 넓은 테라스를 가지고 있는 회원분의 집에서 요가 수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왜 그렇게까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그 선생님이 맡아하는 월수금 수업 시간을 좋아했기 때문에 상실감이 컸다. ‘나도 옮겨 가야 하나’ 잠시 흔들렸으나 나에겐 언제나 부담 없이 9시 반이면 쉽게 내려올 수 있는 요가 스튜디오의 위치도 중요했다. 게다가 회원의 집에서 수업을 한다니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판단에 나는 새로온 월수금 선생님 수업에 적응하기로 했다. 내 예상은 맞았다. 두 달쯤 지났을 때 몇 사람이 다시 우리의 요가 스튜디오로 돌아왔다. 회원분의 테라스에서 더 이상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월수금 선생님이 요가 스튜디오를 오픈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고 했다. 그 돌아온 사람 속에 조각가 선생도 섞여있었다. 가끔 그때 돌아오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단정한 단발머리에 목소리가 낭랑한 새로운 월수금 선생님 방식에 적응해갔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으나 내게는 요가 선생님이 바뀌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새 선생님의 방식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거나 바르지 않은 상태에서 굳혀진 것들이 교정이 되기도 했으니까. 새 원장이 된 선생님은 여전히 화목을 맡아 지도를 했다. 새 원장이 달라진 건 없었을 것이다. 달라진 것 나였다. 내게 새 원장 선생님을 향해 잡념이 생긴 것이다. 내가 요가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요가를 하는 동안에는 오로지 그 순간에 집중할 수 있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요가를 시작하고 처음에 나는 한동안 요가 전도사가 되었는데 누군가와 대화 중에 어디가 아프다는 얘기를 들으면 갑자기 진지해져서 요가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특히 책상에 많이 앉아있는 학생이나 편집자나 동료들을 만나면 좀 더 집중적으로 ‘우리는 요가를 해야 해, 그래야만 자신의 몸에 대해 알 수 있어’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럴 때면 상대방은 내 말뜻과는 무관하게 나에게 요가를 잘하느냐고 묻곤 했다.

나는 요가를 꾸준히 해왔을 뿐 잘하지는 못한다. 요가 스튜디오엔 아쉬탕가 요가 자세 포스터가 벽에 붙어있는데 지금도 내겐 불가능한 동작이 셀 수 없이 많다. 아직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자세들도 있다. 요가 중에서 왕의 자세라고 하는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데도 일 년이 걸렸다. ‘존재의 뿌리를 하늘로 다시 역전시킨다’는 자세라는 글을 읽고 그 문구에 반해서 수없이 도전해봤지만 몸통의 균형이 깨져있어 회복시키는 데 시간이 걸렸다. 뒤로 혹은 앞으로 꽈당 하고 넘어지는 게 몇 달이 지속되었다.

다른 일을 하다가 성과가 그리 없었으면 아마도 포기했을 것이다. 진전 없음에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요가를 해온 이유는 성과와는 별개로 내 몸에 집중할 수 있어서였다. 요가를 하는 동안은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들이 나를 떠나갔다.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 하고, 누구에게 전화를 해야 하고, 모레는 누구를 만나기로 했고…… 자동입력기처럼 뇌 속에 떠다니는 생각들에서 벗어났다. 심지어는 쓰고 있는 소설 생각에서조차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쁘면서도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요가 속으로 깊이 들어가 그 속에만 있고 싶어 하게 되면 어쩌나 싶은 두려움. 요가를 하는 동안에만 나는 오롯이 내 발가락을 바라보았다. 내 무릎의 상태에 집중했다. 작은 통증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내 어깨를 눈을 감은 채 직시했다. 요가를 하면서야 나는 내 새끼발톱의 기형 상태가 이제는 치료되지 않을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발가락 사이사이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벌어지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잃었다는 것도. 스스로 움직이는 힘을 잃은 것은 새끼발가락뿐만이아니었다. 복부의 힘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바닥이 나있었고, 등 또한 틈만 나면 나도 모르게 구부러지진 채 생활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소머리 자세를 하기 위해 앉은 자세에서 무릎을 굽히면 오른쪽과는 달리 왼쪽 무릎이 팽팽하게 당기며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 빠진다는 것도. 오른손을 머리 뒤로 넘길 때는 아래에서 등으로 올린 왼손을 마주잡을 수 있으나 그 반대로 왼손을 머리 뒤로 넘기고 등 아래에 펼쳐둔 오른손을 잡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어디 하나 빼놓을 데 없이 나의 몸은 불균형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 게 나에겐 요가였다. 내 육체의 불균형들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집중할 수 있어서였다. 나는 그 집중이 좋았다. 그 집중을 통해 나는 처음으로 무심했던 내 몸의 처지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조각가 선생과 나는 가끔 서로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곤 했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균형을 잃어 그렇게 흔들렸을까.

 

그런데 그 집중 사이로 잡념이 불쑥불쑥 끼어들었던 것이다. 새 원장 선생님을 평소에 유난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라 여겼던 것의 반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수줍음의 리듬을 깨지 않으려고 작은 목소리에도 불만을 가지지 않고 내가 알아들으려고 귀를 기울였고 순하고 친절해 보이는 눈을 가끔 응시하기도 했다. 그런데 원장이 되자 월수금 선생님을 그만두게까지 했다고 보기와는 다른 사람이었나 잡념을 소멸시킬 에너지가 내게 없었는지 마음의 소용돌이가 잔상처럼 따라다니더니 화목 수업에 빠지게 되는 날까지 자주 생겼다. 생각해보면 지하철이 닿지 않은 동네의 요가 스튜디오의 상황은 안정되어있던 적이 드물었다. 원장이 바뀐 것만도 네 번이었다. 요가 선생님들도 자주 바뀌어 처음 경험하는 것도 아닌데도 무엇 때문인지 한번 끼어든 잡념은 계속 나의 요가를 방해했다. 그만둔 월수금 선생님은 요가 스튜디오의 원장이 바뀌는 과정에서도 계속 함께해왔다. 새 원장이 된 선생님보다 더 오래 봐와서 그런 분을 그만두게 했다는 것에 반감이 작용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분이 스스로 그만두었다면 없었을 마음. 나에겐 원장이 누구든 내 동네 요가 스튜디오의 주인은 그만둔 월월수금 선생님같이 여겨졌다. 그만큼 그분의 요가 스튜디오의 수업에 대한 애정은 열성적이어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로 (설명될 수 없는) 결속되어있었나 보았다.

그렇게 새 원장 선생 수업에 빠지게 되는 날이 많아지는 중에 갑자기 아침반 모든 수업을 새 원장 선생님이 수업을 하는 걸로 정해졌다. 오랫동안 정든 선생님을 잃고 새 선생님과 적응을 마쳤는데 새 선생님도 그만둔다는 것이었다. 우리 몇몇은 저항을 했다. ‘이렇게 되면 저녁반은 선생님이 두 분이라 다른 방식의 수업을 받을 수 있는데 아침반 모두를 원장 선생님이 맡으면 아침반은 골고루 수업을 받을 수 없으니 불공평하지 않느냐’부터… ‘수업을 더 하고 싶어 그런 것이면 화목을 다른 선생님께 주고 원장 선생이 월수금을 하면 되지 않느냐, 아니면 저녁반 선생님이 아침반으로 오기도 하고 원장 선생님이 저녁반으로 가기도 하면 어떻느냐’는 오버하는 안까지 내가며 기존의 방식을 그대로 유지해줄 것을 청했으나 허사였다. “새 원장님이 절이고 우리가 중인가 봐요,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요.” 가장 오래된 회원인 나와 조각가 선생은 낙담하며 처음으로 요가원 바깥에서 만났다. 동네 다른 곳에 개업 중인 필라테스와 요가를 겸한다는 곳에서 뿌린 전단지에 나온 장소를 찾아갔다. 우리는 그들의 설명을 들으면서도 새 원장 곁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나에게는 그곳에는 아침 9시 반 수업이 없었고, 조각가 선생에게는 차를 세워둘 주차장이 없었다. 이미 한번 떠났다가 돌아온 조각가 선생은 며칠 뒤에, 나는 그보다 더 며칠 뒤에 새 원장이 아침반을 모두 지도하는 우리들의 요가 스튜디오에 다시 나갔다. 새 원장 선생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아침반을 생기 있게 이끌어갔다. 조각가 선생과 나는 가끔 서로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곤 했다. 마음이란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균형을 잃어 그렇게 흔들렸을까.

우리들의 저항이 무색하게 우리들의 요가 스튜디오 아침반은 9시 반에서 오 분만 늦어도 매트를 깔 자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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