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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디에 이르는 것,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
사마디에 이르는 것,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
  • 신미진
  • 승인 2019.04.05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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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 요가는 우리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영적인 에너지로 바꾸어 궁극적인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요가 수행 체계 중 하나이다. 진리를 찾는 이에게 이러한 단계들은 파탄잘리가 살았던 그 시대에도 중요했던 것처럼 현재 우리가 사는 오늘날 역시 중요하다. 라자 요가의 8단계는 야마, 니야마, 아사나, 프라나야마, 프라트야하라, 다라나, 디야나, 사마디이다. 이번에는 마지막 단계인 사마디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사마디에 이르는 것, 진정한 자아를 찾는 것

여동구

 

■ 요가 수행자의 최종 목적지

사마디(samadhi)는 ‘Sam-a-dha’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어근 ‘dha’는 ‘마음을 어떤 대상으로 향하게 하거나 고정하는 것’, ‘마음의 통일 또는 집중’을 의미한다.

“집중 속에 있는 의식의 상태, 그리고 어떤 욕망도 없이 신성한 빛에 의하여 조명되는 상태, 그 초의식의 상태를 가리켜 사마디라고 부른다.”
―안나푸르나 우파니샤드 1. 48

“사마디란 바람 한 점 없는 곳에서 빛나고 있는 램프의 불꽃과도 같이 의식이 모아져 정지되어있는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그러므로 집중의 느낌과 ‘나(집중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의 느낌도 점차 사라지게 된다.”
―아드야트마 우파니샤드 35

사마디는 초의식, 해탈의 상태, 요가 수행자의 최종 목적지이다. 결국 구루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루란 현재 인도에서는 일반적으로 선생님을 통칭하는 용어로 쓰이지만, 구루의 기원은 <우파니샤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전적으로는 산스크리트어로 힌두교에서 신성시되는 인물인 브리하스파티를 말한다. 또한, 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말한다. 7번째 단계인 명상의 단계를 잘 거쳐 깨달음을 얻게 되면 나라는 존재를 찾을 수 있게 되고, 모든 이는 자아를 깨닫는 그 순간 해탈의 단계인 사마디에 올라서게 되는 것이다. 사마디에 올라 서게 되면 진정한 구루가 되는 것이다.

사마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를 찾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또한, 나라는 존재, 즉 자아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면 그 이전에 아트만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이다. 아트만은 고대 인도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 브라만과 함께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인 자아(육체, 생각, 마음)’와 대비해 절대 변치 않는 가장 내밀하고 ‘초월적인 자아(영혼)’를 말한다. 산스크리트어로 ‘호흡, 숨’을 뜻하는데, 아트만이 신체에서 떨어지면 인간은 생명을 잃는 것과 같다. 아트만이 계속해서 다른 신체를 부여받는 것을 윤회(삼사라)라 하며, 이 윤회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해탈(묵티)이라고 한다.

물질적인 자아는 변해도 순수 자아인 아트만은 변하지 않는 것, 그 아트만을 깨닫는 것이 사마디이다. 지금부터 ‘물질적인 자아’와 ‘순수 자아’에 대해 알아보자.

 

■ 물질적인 자아 VS. 순수 자아

직업이 군인이 한 남자가 있다. 직업이 군인이고 직위가 대위인 그는 군인일까? 질문이 어려운가? 직업이 군인인 그에겐 분명 자아가 존재한다. 실제 군인이 ‘나’라고 생각하지만, 집에 돌아와보자. 이제 그 군인은 한 가정의 가장이고, 한 여자의 남편이며, 아이들의 아빠이고, 부모님에겐 아들이다. 그럼 그의 자아는 군인인 걸까, 가장인 걸까, 아니면 남편인 걸까? 겉모습이 바뀌고 환경이 바뀐 거지 자아가 바뀌거나 변한 것은 아니다. 만약 군인이라는 그의 직업이 바뀌면 그는 군인이 아닌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자면, 군인, 가장, 남편, 자식, 아빠도 아닌 본연의 자아가 있으며, 우리는 그 자아를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군인, 남편, 가장… 이런 것들은 물질적인 것에 불과하다. 물질적인 것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 그건 내가 아니다.

이렇듯 주변의 환경이 바뀌는 것이지 절대자아가 바뀌는 건 아닌데 대부분 사람들은 착각을 한다. 그 착각이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오게 된다. 여기 경찰관이 있다. 휴가철, 가족들과 여행 가는 길에 도움을 요청하는 시민을 만났다. 여행을 포기하고 시민을 도와야 할까? 아니면 가족과의 여행을 택해야 할까? 정답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이 옳다고 경찰관에게 강요할 권리도 없다. 그 어떤 것을 택하든 그건 그의 선택이지 절대 잘못을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자를 선택하고 가족들과 불화가 생겼다면 과연 전자를 선택한 그가 행복할 수 있을까? 만약 후자를 선택했다면 그는 나쁜 사람이라고 우리가 비방할 수 있을까? 자아를 깨닫지 못한 채 경찰관이 자아라고 착각하게 되면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불행해진다. 중요한 것은 자아를 정확히 깨닫고 있다면 경찰복을 입고 있을 때와 벗고 일상생활로 돌아왔을 때 늘 한결같기 때문에 불행하지 않아도 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엔 직업에 귀천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른 새벽부터 거리 청소를 하는 청소부도 자기의 자아를 깨닫고 있다면 직업의 귀천이 없어져 위축이 되거나 불행하지 않을 수 있다.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깨끗한 길을 다니게 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하는 청소부와, 매일 청소나 해야 한다며 신세한탄을 하는 청소부가 있다. 어떤 청소부가 될지는 그의 깊은 곳에 자리한 진정한 자아가 결정한다. 세상이 말하는 직업의 귀천은 청소부 복장을 하고 있는 껍데기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아를 찾게 되는 순간 직업의 귀천이 없어지고 눈에 보이는 물질에 위축되거나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자아를 찾을 수 없다. 그러면 항상 나 아닌 다른 이로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자아를 찾아 내가 나의 중심이 되고, 외부로부터 흔들림이 없고, 다른 삶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게 된다.

 

■ 궁극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해

결국 사마디의 상태, 깨달음을 얻으려는 이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죽기 전에 후회를 많이 한다. 평생 회사에서 일만 하고 살다가 죽기 전에 후회한다. 내 삶에서 나라는 존재는 없고 그냥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부모로 살다가 나라는 존재를 찾지 못했다고, 그래서 불행하고 후회스럽다고 이야기한다.

후회하지 않고 살아가려면 나를 찾아야 한다. 얼마 전 종영한 TV 드라마 <SKY 캐슬> 속 주인공의 대사 중에 ‘엄마가 시키는 대로 엄마의 아들로 살다보니 불행하다’고 한 부분이 기억난다.

자아가 확실해지면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무엇이든, 나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의 자아를 찾았는가? 찾았다면, 그리고 깨달음을 얻었다면, 여러분이 바로 진정한 요기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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