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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요가 다녀왔습니다" │ 나, 요가 하러 가요!
신경숙의 "요가 다녀왔습니다" │ 나, 요가 하러 가요!
  • 신미진
  • 승인 2019.02.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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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요가 다녀왔습니다”

나, 요가 하러 가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건강을 마흔이 되는 동안 다 소진시킨 뒤에 나의 몸 상태는 권투 시합 중에 발생하는 그로기(groggy) 상태였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형용사 그로기는 ‘그로그’라는 일종의 칵테일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한다. 어쩌다 어떤 말을 알게 되고 그 말의 어원을 따라가보면 재미있는 일화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로기라는 단어도 그중 하나다.

이름을 잊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그 이름은 에드워드 버넌이다. 그는 영국의 제독이었는데 평소에 견직물과 모직을 합해서 짠 그로그램(grogram)이라 불리는 천으로 만든 제복을 입기를 즐겼다고 한다. 가끔 어떤 사람들의 취향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이름을 짓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데 버넌 제독도 그런 경우다. 그로그램으로 짠 제복을 입는 그의 취향 때문에 그는 부하들에게 오래된 그로그(old grog) 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나는 그로그램이라는 옷감이 어떤 옷감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데 그 옷감의 특성이 방수가 잘되는 것이라 하니 해군의 제복으로 가장 적합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17세기의 장기 항해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배로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가거나, 또 아프리카를 돌아서 태평양으로 항해를 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이 물 수급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바다에 물이야 가득이지만 그걸 증류해 마실 기술이 없던 때라서 오래된 나무통에 마실 물을 가득 담아 싣고 항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가 바로 짐작할 수 있듯이 고여있는 물에 이끼가 끼고 더러워져 ―물은 어디론가 흘러가야만 썩지 않는다― 마실 수가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래서 맥주라든가 와인을 타서 좀 더 오래 마실 수 있게 하기도 했으나 그 또한 항해가 계속 이어질 때는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사탕수수를 증류해서 만든 럼주를 물에 타서 물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이처럼 생존하는 데 불리한 상황이 닥치면 그걸 딛고 나아갈 수 있는 그 무엇인가를 창출해낸다. 그게 목숨을 가진 존재들의 힘이리라. 무얼 만들면 또 문제가 생기고 그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또 무엇인가를 발명하고… 이런 반복이 오늘날의 이 현재를 만들었을 것이다. 사탕수수를 증류해서 만든 럼주를 물에 타서 마시면 고인 물에서 나는 냄새도 제거되고 도수가 높으니 물이 소독되는 역할을 해서 장기 항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을 줄여주었다고 한다. 세상의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듯이 럼주 또한 좋은 영향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도수가 높아서 럼을 마신 수병들이 빨리 취하는 통에 발생하는 문제가 심각했다고. 그래서 버넌은 럼주를 배급할 때 술과 물을 따로따로 주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 둘을 일정 비율로 타서 배급을 하게 했다고 한다. 그것으로 모자라 럼주를 탄 물에 설탕과 레몬을 넣어 마시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로그 칵테일의 탄생이라고. 17세기나 지금이나 시대를 가로질러 술꾼들은 있게 마련인가 보다. 장기 항해에서 물 대신 마시라고 배급하는 이 그로그를 술꾼 수병들은 하루하루 모았다가 어느 날 한꺼번에 마셨고 그로그에 취해 비틀거리고 근무지를 이탈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로그를 모아 마셨다가 시쳇말로 군기가 흐트러지고 비틀거리며 근무지를 이탈하는 등 사고를 발생시켰는데 바로 그것이 ‘그로기’라는 형용사를 탄생시킨 순간이라고 한다.

 

드디어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일조차 힘든 지경이 되었다. 
문득 ‘이러다가 글을 못 쓰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에 울적해지지 않았으면 요가원에 등록하는 일은 
한없이 미뤄졌을 것이다.

 

이야기가 약간 샛길로 샌 듯한데 마흔을 앞둔 내 몸 상태가 바로 그 그로기 상태였다. 무기력과 어깨 통증은 좋은 햇살 앞에서도 이마를 찌푸리게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내 책상이 있는 서재로 내려오려면 계단 열 몇 개를 내려와야 하는데 계단을 디딜 때마다 발바닥이 아파서 난간을 붙잡고 가능하면 발바닥에 힘이 가지 않도록 주의했다. 몸이 그로기 상태가 되자 봄날 집 앞의 은행나무에 아기 손가락들처럼 새 잎이 돋는 것을 보는 일도 기쁘지 않았다. 우편함에 출판사에서 보내준 반가운 필자의 책을 꺼낼 때도 시무룩했다. 시골의 엄마가 야생이라면서 푸른 청매실을 보내주면 ‘이걸 또 언제 씻어 물기를 닦아 유리병에 담나…’ 귀찮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식구가 무슨 말을 걸어오면 앞뒤 맥락을 생각지도 않고 대답을 퉁명스럽게 내뱉게 했다. 내가 말하고도 깜짝 놀라곤 했다. 잠깐만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될 일을 “그 말 언제까지 계속할 거야?”라고 쏘아붙이고 무슨 요청을 하는 이메일에 대부분 짤막하게 답했는데 대부분 부정적인 답변을 했다. 시간을 낼 수가 없다, 그건 하지 않겠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같은.

그러니까 내 몸은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넘치게 사용하기만 하면서도 휴식과 위로를 주지 않은 나 자신에게 강하게 저항을 해온 것인데 요가원에 등록을 하기 전까지 나는 내 몸의 말을 들어줄 여유가 없이 살았다. 드디어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리는 일조차 힘들어질 지경이 되었다. 문득 ‘이러다가 글을 못 쓰게 되는 건 아닐까?’ 싶은 불안감에 울적해지지 않았으면 요가원에 등록을 하는 일은 한없이 미뤄졌을 것이다.

처음으로 등록한 요가원의 첫 수업은 9시 반이었다. 1시간 10분 수업. 첫 시간이 10시 40분에 끝나면 잠시 쉬었다가 두 번째 수업이 11시에 시작되어 12시 10분에 끝났다. 저녁반은 6시 반과 8시에 있었다. 이렇게 하루에 네 번의 수업이 마련되어있었다. 다른 요가원은 초급반 중급반 상급반 이런 식으로 반을 나누어서 레벨이 다르게 수업을 진행하는 모양이나 우리 동네의 요가원은 등록을 한 회원들이라면 아침반이든 저녁반이든 시간에 구애 없이 자신에게 맞춰서 어느 시간이나 출석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요가를 지도하는 선생님들도 여러 분이었다. 월, 수, 금, 선생님과 화, 목에 출강하는 선생님이 달랐고 아침반과 저녁반 선생님들도 달랐다. 나는 자연스럽게 아침 9시 반 시간을 혼자 정했다.

 

결혼 전의 나의 시간은 하루를 온통 나를 위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글 쓰는 시간도 ‘항상’이었다. 작품에 들어가면 맨 먼저 냉장고에 식료품을 가득 채워두었다. 바깥에 나가지 않아도 열흘 정도는 기본적인 식사를 해결할 수 있을 만큼 구워 먹을 수 있는 생선은 얼려놓고, 야채는 시드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위주로 구해서 쌓아놓고, 과일과 요거트 등등으로 적어도 2주일 정도는 장을 보지 않아도 될 양의 식품들을 채워놓은 다음에 하는 일은 수화기가 연결된 전화선을 뽑아놓는 것이었다. 환기시킬 때만 빼면 줄곧 나의 창은 블라인드가 내려져있었다. 빛을 차단해놓고 언제나 밤처럼 해두었다. 밤과 낮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게 해놓은 공간에서 나는 배고프면 무언가를 만들어서 먹고 쓰고, 졸리면 침대가 아니라 집안 아무데서나 쓰러져서 자고 또 쓰고, 가끔 세상이 궁금해 블라인드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바깥 풍경을 내다 본 뒤에 또 쓰고… 그랬다. 그때의 나에겐 또 쓰고 또 쓰고의 리듬을 깨지 않는 방식이 그거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작품을 마칠 무렵이면 냉장고는 텅 비어있고 청소를 하지 않아 집안은 먼지투성이에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시디들 책들 벗어놓은 셔츠나 양말들이 굴러다녔다. 그게 나의 30대였다.

결혼을 한 후에 나는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이제는 나 혼자 쓰는 시간이 아니었다. 가족이 된 그랑 함께 쓰거나 나눠 써야 했다. 가족을 얻은 대신 시간 배분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절대적으로 아무도 침범하지 않은 나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내 기상 시간은 새벽 3시로 정했다. 새벽 3시라는 시간에 깨기 위해서 11시 전에 잠자리에 들려고 노력을 했다. 지금은 드문 일이지만 30대의 시간들은 때때로 저녁 자리가 있어 나갔다가 그들과 헤어지지 못하고 새벽에 집에 들어오는 날도 있던 때였다. 어떤 상황에서든 새벽 3시부터 9시까지는 내 책상에 앉아있는다, 이것이 내 다짐이었다. 이건 언제까지나 직장이 있는 곳으로 출근하지 않는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시간 배분이다. 졸리면 언제든지 짧은 낮잠을 잘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 작가라는 게 감사할 때가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자유롭게 배분할 때이다. 새벽 3시에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는 데는 의외로 빨리 적응되었다. 자연스럽게 새벽 3시에 눈을 뜨게 되는 데는 3주일도 안 걸린 것 같다. ‘내가 새벽형 인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새벽 3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별로 무리하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어쩌면 유전자에 인이 박혀있는지도 모를 일. 내 부모는 농부다. 그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이 체화된 분들이다. 특히 여름철에는 새벽부터 논이나 밭에 나가서 오전 11시 안에 하루 일을 거의 다 해버린다. 11시가 지나면 햇볕은 따가워지고 오후의 대지는 그야말로 작열해서 일을 할 수가 없는 지경이 되니까 하루 일을 새벽부터 오전에 다 마쳤을 것이다.

새벽 3시에 기상하기 위해 처음에는 알람을 맞춰놨지만 얼마 후에는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되었다. 그 시간쯤 되면 알람이 울리기 전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부엌으로 나와서 무선 주전자에 물을 데워서 한 잔 마시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다. 물을 마시고 세수는 하지 않고 손만 씻고 책상이 있는 방으로 와서 써야 할 글이 있을 때는 글을 쓰고 책도 읽고 소설의 자료가 될 것들을 챙겨 보고 메일을 체크하고 답장할 메일에 대해서는 답장을 한다.

 

식구가 없어도 나는 아침에 요가원에 갈 때면 
“나, 요가 하러 가요!” 하고 평소 말할 때보다는 
좀 큰 목소리로 아무도 없는 공간을 향해 외친다. 
그리고 곧 나 자신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느낀다. 

 

여러 요가 수업 시간표 중에서 9시 반 시간을 택한 이유는 그때쯤엔 습관이 된 그 시간 배분 때문이었다. 이런 시간 배분은 연재를 할 때는 특히 매우 적절했다. 나도 깜짝 놀라곤 했는데 연재를 할 때는 눈을 떠서 시계를 보면 새벽 3시 알람이 울리기 3분 전이나 5분 전 10분 전이곤 했다. 요가를 시작한 후에 첫 연재는 <리진>이었는데 이 시간 배분이 참 연재하기에 좋았다. 저녁에 일찍 잠들고 새벽 3시에 깨어나 글을 쓰고, 8시 반에서 9시 사이에 식구가 간단히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살펴주고, 나는 빈속으로 9시 반에 시작하는 요가를 하러 갔다. 연재 덕분에 그것이 내 하루 일과의 자연스러운 패턴으로 자리잡았고 지금껏 그게 유지되고 있다.

요가를 하러 집을 나올 때면 나는 식구에게 큰 소리로 “나, 요가 가요!” 말한다. 식구는 내가 요가원에 다니겠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며 “한번 해봐…” 하는 반응이었다가 나중에는 매우 반겼다. 내가 요가 하는 것을 반기는 이유를 그에게 대놓고 물어보진 않았지만 요가를 시작하고 난 뒤에 내가 상냥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기도 하는 듯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곤 했다. 그래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에 빠지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사라졌다. 그것은 요가가 단순히 자신의 몸을 살피는 일만이 아니라는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로 연결되는 증거이기도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 요가 하러 가요” 말할 때 식구가 식탁에 앉아있을 때는 바로 “다녀와” 하는 대답이 들린다. 처음에는 그 대답을 듣는 게 참 좋아서 요가원으로 출발할 때마다 외치듯이 “나 요가 하러 가요” 했던 것 같다. 식구는 내 눈앞이 아니라 그의 서재에 있을 땐 “응 그래!”라고 좀 더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해주곤 했다. 식구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 있을 때는 당연히 아무런 응답이 없다. 그래도 나는 한결같이 “나 요가하러 가요”라고 말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가 집에 없는 날에도 내가 요가를 하러 가기 위해 집을 나서며 “나 요가 하러 가요!” 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나온 말이라 ‘뭐야? 아무도 없는데’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그런데 그런 일은 계속되었다. 식구가 없어도 나는 아침에 요가원에 갈 때면 “나, 요가 하러 가요!” 하고 평소 말할 때보다는 좀 큰 목소리로 아무도 없는 공간을 향해 외친다. 그리고 곧 나 자신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을 느낀다. ‘오늘은 쉴까’ 싶었던 마음, 잘 되지 않는 소머리 자세 같은 동작에 집착해서 ‘왜 이렇게 안 될까’ 실망으로 접어들려는 마음들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고 ‘자, 이렇게 요가 하러 간다고 외치기까지 했으니 잘하고 오자’ 하는 마음이 앞으로 나서는 활력을 느낀다.

 

 

 

신경숙 작가는
스물두 살 되던 해에 중편 ‘겨울우화’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단편 소설집으로는 〈풍금이 있던 자리〉, 〈감자 먹는 사람들〉, 〈딸기밭〉, 〈종소리〉, 〈모르는 여인들〉이 있고, 장편으로는 〈깊은 슬픔〉,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바이올렛〉 등이 있으며, 〈외딴방〉,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리진〉이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출판되었고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 유럽을 비롯해 37개국에 번역 출판되며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호암상과 한국 문학 최초로 맨아시아 문학상을 수상했다. 요가로 마음을 정돈하고 글로 마음을 전달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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