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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 자리를 지켜온 그녀를 생각합니다
평생 그 자리를 지켜온 그녀를 생각합니다
  • 김이현
  • 승인 2019.02.21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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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 자리를 지켜온 그녀를 생각합니다

김이현 발행인

 

그녀를 처음 본 곳은 파르마스 니케탄 아쉬람이었습니다. 아쉬람에서 만트라를 가르쳐준다는 정보를 듣고 새벽잠을 떨치며 온 곳이었습니다. 무료 수업이었지만, 대리석 바닥만큼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은 십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읽지도 못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얇은 만트라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히말라야에서 불어오는 쌀쌀한 기운을 떨쳐내려고 애쓰고 있었습니다. 대리석 위에서의 아사나 수업도 어느 정도의 인내심을 가지며 극복해야 하는 한기였지만, 가만히 앉아만 있어야 하는 만트라 수업은 곤혹스러운 몇 시간을 예고하는 것처럼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녀는 다소곳했습니다. 조용한 걸음걸이와 출가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주황색 옷, 그리고 머리 위로 뒤집어쓴 주황색 스카프는 오랜 시간, 신과 함께한 사람의 특유한 기운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옅은 미소는 언제나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을 내려놓게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다문 입술은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는 위엄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사람들을 한번 쭉 둘러보더니, 하모니움 건반을 누르며 조용히 “옴” 챈팅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텅 빈 공간의 울림이었고 알아듣지 못하는 산스크리어였지만, “옴” 챈팅 이후에 울려퍼진 만트라는 세상에서 이제껏 듣지 못했던 소리였습니다. 가느다랗게 퍼지는 소리였지만 묵직했으며, 울림을 주는 무게만큼 산뜻했습니다. 처음 눈을 감고 들었을 때의 감동은 어지러운 마음을 바로잡아주기에 충분했고, 대리석의 차가움은 잊은 지 오래전이었습니다. 어쩌면, 눈물을 흘렸던 것 같기도 합니다.

사라스와티는 파르마스 니케탄 아쉬람의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스와미지가 없으면 강가 뿌자를 주최하며 이끌어가고, 아쉬람의 모든 것을 돌보며 관리한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하루 종일 리시케시 뒷골목을 돌아다니다가도 해가 질 때면 어김없이 아쉬람 앞, 갠지스강 가로 달려갔는데, 매일 열리는 뿌자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곳에 가면, 언제나 사라스와티의 고요함과 인자함이 묻어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만트라 챈팅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시끄러운 밤을 보낼 때, 히말라야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오신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아마 잠도 못 주무시며 눈을 감고 명상을 하셨을 것이라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녀를 다시 본 곳은 일본 히로시마의 작은 호텔, 아주 비좁은 복도였습니다. 두 사람이 지나가기에는 몸을 한쪽으로 조금 비켜서야만 하는 곳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는 순간, 그녀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그녀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변함없이 안경 너머로 나를 한 번 보고 가볍게 목례를 하며 지나갔습니다. 그녀가 바로 내 옆방에 묵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어젯밤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히로시마 요가피스에서 프리야 빈야사 수업을 해달라고 했을 때,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빈야사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었고 통역이 붙는 수업도 처음이라 무척, 떨리는 마음으로 도착했습니다. 이틀 동안 하루에 한 타임씩, 총 두 타임을 해야 했는데, 일본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수업을 해야 하는 부담감은 생각보다 크게 마음을 동요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통역을 해준 히키박 선생님의 노련함과, 같이 동행한 요가쿨라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생각보다 무사히 수업을 마칠 수 있었고, 피드백들이 좋아서 한껏 고조된 마음이 되었습니다. 모든 수업을 무사히 마친 사람의 후련함이 조금은 과했던 걸까, 우리들은 일본의 비좁은 호텔방에 쪼그려 앉아 웃고 떠들며 밤을 거의 새우며 놀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조금은 낯 뜨거울 정도로 어글리한 한국 사람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일본의 호텔방은 옆에서 조금만 떠들어도 다 들릴 정도로 방음 시설이 형편없었는데도 우리는 지칠 줄 모르며 즐거움으로 가득했던, 밤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히로시마에 오기 전에 사라스와티 선생님이 오신다는 건 포스터를 보고 알았고, 참 반갑고 신기해하며 만나 뵈면 합장하며 머리 숙여 인사드리려 마음먹었는데… 바로 옆방에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틀 동안 아무 기척도 없었는데 그 좁은 방에서 혼자 무엇을 하셨을까? 우리가 시끄러운 밤을 보낼 때, 히말라야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오신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밤새 들려오던 떠드는 소리에 어쩌면 정말, 한마디를 안 하셨을까? 그때, 선생님은 잠도 못 주무시며 눈을 감고 명상을 하셨을 것이라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생님들과 이야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로 10년이 지난 세월 동안 사라스와티 선생님은 변함없이 매일 저녁이면 갠지스강 가트 앞에서 뿌자를 진행하며 노래를 부르십니다. 아마도 평생을 매일 그 자리 그곳에서 그렇게 챈팅을 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 그렇게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다르마를 지키며 해야 할 자신들의 일을 묵묵히 하면서,
더 가지거나 덜 가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저보고 왜 매년 같은 곳을 가냐고, 한 번 가본 곳보다는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이 좋지 않냐고 묻습니다. 물론 저도 항상 같은 곳만 가지는 않지만, 한 번 가본 곳은 다시 가보는 습관 아닌 습관이 생겼습니다. 조금은 익숙함에서 오는 편안함과 안정감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곳에 내가 만났던, 또는 스치며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들은 항상 변함없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가네샤 상을 다른 곳보다 3배도 더 비싸게 팔았던 상점 주인도 언제나 같은 장소에 있었고, 바로 옆 가게에서 같은 그림을 더 싸게 팔고 있는데도 손으로 직접 그린 그림이라며 다른 곳에서는 살 수 없다고 태연하게 거짓말하던 그림 파는 청년도 있었고, 지나갈 때마다 친구며 형제라고 두 손 벌려 환영해주던 주얼리 가게 사장도, 짜이를 한 잔 주며 호탕하게 웃던 게스트하우스 주인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그곳에 있습니다. 내게 열심히 신에 대해 이야기해주며 돈을 요구했던 사두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씨를 파는 허름한 카페 아저씨도, 모두 언제나 그곳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 그렇게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다르마를 지키며 해야 할 자신들의 일을 묵묵히 하면서, 더 가지거나 덜 가지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그런 곳을 그리워하며, 어쩌면 모두 그런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있는 지금의 내 자리가 어떤 모습으로 또는 어떤 환경으로 변하더라도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 그렇게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그런 나를 기억하고 찾아온다면 있는 그 모습 그대로 기꺼이 환영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정말, 참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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